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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나는 카페인 중독자였다 (카페인 끊은 후기)

by 메기127 2020. 8. 27.

 

 

 

 

 나는 카페인 중독자였다.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대략 중학교 2학년 때부터이다. 조금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프림과 설탕의 차이도 모를 만큼 어렸을 적부터 나는 믹스 커피의 맛에 푹 빠져있었고, 가족들, 특히 할아버지가 커피를 마실 때마다 그 옆에서 홀짝홀짝 몇 모금을 얻어 마시곤 했다. 나만의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된 계기는 여느 학생들과 다름없이 공부였다. 성적에 민감,을 넘어 신경질적이었던 나는 평소에는 하루 한 잔, 시험기간에는 하루 두 잔의 커피를 마시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를 했다. 방학 때는 달랐나 생각해봤지만 끊임없이 학원과 보충수업이 있었으니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선 작은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의 나를 질책하는 것은 아니다. 그때는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 같아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을지 모른다.

 

 금단현상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몇 년 동안 매일 카페인에 절여져 있던 나는 일어난 지 한 시간 내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끔찍한 두통을 느끼게 되었다. 뒤늦게 마셔도 두통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더 이상 잠을 쫓는 용도가 아니었다. 더 이상 집중력을 높이는 용도가 아니었다.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마셨다. 그러고도 시험기간엔 최대의 효과를 보기 위해 몇 잔을 연거푸 마셨다. 어떤 날은 가슴이 빠르게 뛰고 정신이 멍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불행히도 재수를 하는 바람에, 1년의 커피 통조림 생활을 추가하여 거의 6년간 매일 카페인을 섭취하고 나자 의학 지식이라곤 전무한 (그리고 자신의 건강에 극도로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입시 준비를 할 때에는 두통을 달고 생활할 수 없었고, 다른 대체제를 찾아볼 시간도 없었기에 커피를 끊는 시도는 해보지도 못했었다. (가끔씩 주말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해봤자 두통으로 하루를 날릴 뿐이었다.) 시간이 남아도는 대학생 시절 커피를 끊으려는 나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첫 시도는 고등학생 때와 다를 바 없이 무작정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바로 큰 고통이 찾아왔다. 6년간의 기억은 하룻밤만에 사라지기엔 너무 커다란 것이었다. 원래의 계획은 3일마다 한 잔씩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는데 이틀도 안되어 일상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고 소화불량이 심해졌으며 (애초에 소화불량이 생긴 것이 커피 때문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미래의 내가 원망할 정도로 널널했던 신입생 스케줄조차 소화하지 못할 만큼 두통이 심해졌다. 이틀을 겨우 참고 삼일 째 되는 날 커피를 마셨지만 두통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 이후론 두통을 없애고 싶다는 마음만 남아있었고 그렇게 나의 첫 시도는 1회 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후로 나의 커피 생활은 불규칙한 식사와 수면으로 점점 더 안 좋아져만 갔다. 한때 주식이 라떼 한 잔과 나쵸칩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나는 영화에 빠져있었고, 한 컵만 마셔도 배가 부른 라떼와 치즈 소스를 찍은 바삭한 나쵸는 최고의 영화 음식이었다. 영화관에 가서도 항상 라떼와 나쵸를 주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미친 짓이다. 라떼는 소화기관에 최악이다. 특히 아침에 마셨을 경우 더더욱!) 아무튼 그렇게 나의 몸은 점점 썩어갔고 이후로도 커피를 끊으려는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첫 시도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끝났고 결국엔 기왕 마실 거 더 맛있는 것을 마시자!’하는 커피 맛 탐구의 길로 선회하였다.

 

 그렇게 또 몇 년을 원두 냄새나는 향긋한 아침을 맞이하던 나에게 가히 인생 최대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위기가 찾아왔다. 끔찍한 허리 통증과 함께 눈을 뜬 것이다.

 


 

 나는 지난 4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갔다. 사건은 조립해야 할 새 가구가 도착한 어느 봄날이었다. 앉아있으나 서있으나 누워있으나 허리 위쪽이 엄청나게 당기고 아팠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에겐 아무런 의학적 지식도 없지만 척추, 골반뼈가 틀어지고 골밀도가 크게 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척수가 다 빠져나간 느낌이라고 할까? 언니의 도움을 받아 겨우 가구 조립을 마치고 하루 종일 누워있는 수밖에 없었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부터 (이는 역시 커피의 역사가 시작된 지점과 맞닿아 있다. 더욱 의심스러워진다.) 나는 항상 허리 통증을 달고 살았다. 근육이 없어 자세가 안 좋은 데다 밤낮으로 딱딱한 의자에서 움직이질 않으니 척추가 성할리 없다. 최근까지도 약간의 허리 통증과 비뚤어진 골반 정도는 디폴트로 여기고 살았는데, 이삿짐을 나르느라 무리가 갔는지 어딘가 크게 삐끗하고 만 것이다. 한창 코로나로 두려워하던 시기라 병원은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누워서 인터넷으로 한참 검색을 한 후 그렇게 큰 병은 아닐 거라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매우 나쁜 행동이다. 병원에 가라.) 허리 통증 완화를 하기 위해 조깅을 하기 시작했다.

 

조깅의 효과는 굉장했다 !

 

 첫날이라 가볍게 걷기만 했을 뿐인데 다음날 바로 통증이 완화되었다. 어쩌면 운동부족 때문에 악화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더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운동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강도를 높여나가는 걷기/달리기, 허리 강화와 더불어 부가적인 효과로 아름다운 근육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로 근력 운동 등을 점차 추가해 나갔다.

그런데 운동을 하니 매일 하던 습관 하나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물론 커피를 마시는 일이었다. 운동 관련 웹진을 읽다 보면 ‘당신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상식들 : 커피가 운동에 도움이 될까?’하는 제목의 기사들이 보이곤 한다. 기사의 결론은 조금의 부스트 효과가 느껴질 수도 있지만 운동을 위해 다량의 카페인을 섭취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게다가 나는 프리 워크아웃pre-workout을 섭취해야 할 만큼 고강도 운동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 정도의 지식도 없다. 그에 비해 내가 섭취하는 커피의 양은 너무 많았다. 커피가 칼슘 흡수를 방해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그것은 뼈가 삭아가는 나에게 최우선이자 유일한 고려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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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읽었으면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백수다. 작년에 대학을 수료하고 무직이 된 지 10개월째다. (쓰고 나니 정말 긴 시간이다. 무위도식엔 진력이 났습니다. 이제 일을 시켜 주십시오.) 나는 이 상태에 절망하지 않고 지금이 커피를 끊을 최적의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다.

 

그때가 4월 말쯤이었던 것 같다. 정확하진 않지만 실험은 약 3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나의 기본 상태는 아침에 커피 한 잔, 믹스 기준 카누 큰 것 하나, 원두 기준 20g(직접 커피를 내려먹을 땐 믹스보다 맛이 약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두어 번 내려 먹었다.)으로 시작해, 할 일이 많은 때나 카페인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점심을 먹은 후 또 한 잔을 마셨다. 이렇게 매일 섭취하던 1-2잔의 커피를 한 번에 끊는 것은 경험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두통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여유를 가지고, 관대한 마음으로 점차 양을 줄여가기로 결심했다.

 

 처음 1주 정도는 매일 아침 커피를 한 잔만 마셨다. 중간에 커피가 더 마시고 싶어도 마시지 않았다. 백수 초기에는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운이 조금 덜 나는 느낌이었지만 아침에 한 잔을 마셨기 때문에 생활에 지장은 없었다.

 

 그다음 계획은 3일에 한 번씩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나 두통이 생겼고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3일에 한 번 커피를 반 잔 마시는 것으로 변경했다. (1-1-1/2의 루틴이라는 뜻) 플라시보 효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운이 빠지고 졸음이 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백수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늦잠을 잘 수 있었다. 이렇게 2주간 유지했다.  

 

 다음으론 이틀에 한 번씩 커피를 반잔으로 줄였다. (1-1/2의 루틴) 지난 단계에 약간 익숙해져서 그런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여전히 잠은 많이 잤으나 조금 더 개운하게 자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1주일 정도 유지했다.

 

 다음 단계는 지난번에 실패했던 3일에 한 번씩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이었는데, 할만하다고 생각해서 이틀은 커피 반잔을 마시고 3일째에는 커피를 아예 마시지 않았다. 이를 시작한 후 가끔씩 약간의 두통이 있긴 했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마지막 단계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때쯤 되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가 마시고 싶은 감정이 거의 사라졌고, 어떤 날은 커피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린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반 잔 마시기로 되어있는 날이었는데 까먹고 마시지 않은 날,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커피 마시는 걸 까먹다니! 그러고도 머리가 아프지 않다니!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서서히 노력해서 안 되는 건 없다.

 

 결국 3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나는 아예 커피를 마시지 않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약간 하루 종일 정신이 멍해져 있었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래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백수이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상태에서 취직을 하거나 공부를 시작했다면 바로 다시 커피를 찾게 되었을 것이다. 가끔씩 상상 속에 존재하는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치기도 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고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집에 있던 커피 기구들도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비상시를 위한 미니 카누 10봉 만이 찬장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5개월째가 되어가는 지금, 나는 비로소 카페인의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아무런 두통이 없고,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졸음이 밀려오지 않는다. 이제는 가끔 할 일이 많거나 (백수도 할 일이 있다.) 조금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싶을 때, 혹은 커피와 먹으면 기가 막힐 맛있는 디저트를 얻게 되었을 때만 커피를 반 잔 정도 마신다. 마신 후 몸에 이상이 생긴다거나, 더 마시고 싶다거나, 다음날에도 생각난다거나 하는 일은 딱히 없다. 원래도 카페인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었긴 하다. 운동과 식습관 개선과 합쳐져 건강이 좋아졌고(여전히 조깅과 근력운동을 하고 있고, 칼슘을 꾸준히 섭취하려 노력하고 있다. 소화불량도 많이 개선되었다.), 커피 끊기에 성공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커피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이 글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애초에 커피를 매일 마실 정도면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커피의 향이 좋고, 몸을 따뜻하게, 혹은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목넘김이 좋고, 식사 후나 디저트를 먹을 때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쌉쌀한 맛이 좋다. 친구, 가족들과 분위기 좋은 쾌적한 카페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 혼자 앉아 일이나 공부를 하는 것도 좋다. 원두마다 가지고 있는 다른 맛을 알아가는 것도 좋고, 실내 인테리어로도 안성맞춤인 커피 기구들을 집에 들여놓는 것도 좋다.

 

 내가 싫었던 것은, 커피가 아침에 나를 깨워주는 유일한 것이며, 커피를 마시지 않고는 공부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것, 하루 종일 카페인 섭취량을 생각하며 스케줄을 짜야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그 의존하는 기분이 좋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일단 커피를 마시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이 그리고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몸이 안 좋거나 집중력이 흐려질 때면 커피를 안 마셔서 그래라고 생각한다든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커피를 밥 대신 먹는다든지(! 효율!)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계속해왔고 내 삶을 구원해준 커피라는 만병통치약을 얻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건 전혀 건강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무언가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

 

 커피를 끊은 것, 정확히 말하면 카페인 중독에서 벗어난 것의 가장 좋은 점은 앞으로 더 커피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나는 내가 좋아했던 커피의 경험들을 처음부터 다시 느낄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다시는, 중독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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