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의 김민영 , 2021
이재은, 임지선 감독
김주아, 윤아영, 손다현 등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시절이 있다. 열아홉, 성인이 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학교라는 감옥 보호 기관에서 매일 같은 친구들을 만나고 작은 사회를 꾸려간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일주일 단위로 짜인 일정을 가만히 앉아 따르는 틀에 박힌 생활이었기에 우리는 아주 작은 변화조차 강렬하고 생생하게 느꼈다. 친구, 가족, 선생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인 것처럼 예민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향후 몇 년간 실감 나지 않을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나'가 되어 세상에 던져진다. 맨손으로 황무지를 갈고닦아야 했던 개척자들처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고 삼행시 클럽을 만들어 활동하며 온종일 붙어 다니던 민영, 정희, 수산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서로 만날 수 없게 된 상황에서도 영상 통화로나마 클럽 모임을 계속하려 하지만 점점 소원해지고, 서운해진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고향에 남은 정희와 달리 다른 지역에서, 외국에서 대학을 다니게 된 민영과 수산나에겐 더는 과거에 머물 여유가 없을 정도로 새로운 세계가 들이닥친다. 교복을 벗고 나니 같은 일상, 같은 생활공간 등 공통점만 보였던 친구의 낯선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성별, 시대, 대학 진학 여부와 관계없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학창 시절에 아무리 말이 잘 통했던 친구라도, 성인이 되고 나서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고, 더는 말이 통하지 않게 되는 경험은 매우 흔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혹은 너무도 선명한) 계급이 나뉘고, 추억은 하찮고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민영의 자취방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그걸 바라보는 정희의 꼿꼿한 시선에서 누군가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고, 옛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나기도 할 것이다. 나도 영화를 보면서 부끄럽고 사소한 기억이 떠올라 한참을 곱씹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날카로운 통찰이다. 이재은, 임지선 감독님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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