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귀신, 고아원 귀신, 관심 병사 귀신 등등.. 괴담에 자주 등장하는 이 '괴물'들에겐 과연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바로 이들이 소수자들, 낯선 존재들,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비정상'의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알고 보면 이들 모두가 이승을 떠나지 못할 만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장르가 아닌 괴담을 통해 전해지는 경향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이유 없는 살인인 것처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잔뜩 연출해놓고 소통을 시도하면 눈물 나는 사랑이야기,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야기를 늘어놓는 식이다. 어쩔 수 없지, 이들이 로맨스물이나 히어로물의 주인공이 되기는 쉽지 않으니까.
지난 22일 개봉한 조던 필 공동제작, 니아 다코스타 감독의 <캔디맨>은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도시 괴담 속 인물인 캔디맨을 소재로 한 공포영화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무엇보다도 1992년 버나드 로즈 감독의 영화 <캔디맨>을 먼저 떠올리고 비교하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캔디맨>은 흑인 살인마를 내세워 최초로 흥행에 성공한 호러 프랜차이즈로, 원작을 훌륭하게 각색해 지금의 캔디맨의 모습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고전 공포 영화의 필수 요소였던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은 물론, 귀여운 이름과 달리 으스스한 갈고리 손을 달고 자비 없이 단번에 일을 처리하는 살인마의 모습은 장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하다.
비주얼만 살펴봐도, <나이트메어>의 프레디,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같은 비슷한 장르의 살인마들이 마르거나 우둔해 보이는 체격에 극악의 패션 센스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의 캔디맨은 큰 키에 건장한 체격, 기깔나는 코트를 입고 있다.
그리고 영화 시작과 함께 들려오는 그 우아한 목소리! 이토록 매력적인 살인마가 주인공을 은밀하게 압박해오는 상황은 누구라도 전율을 느낄 만하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 그래서 소수자성을 가진 이를 공포의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는 좋을까? 나쁠까?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소수자들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한다면, 그동안 충분히 목소리를 부여받지 못했던 이들이 발언할 기회를 얻게 되지만, 반대의 경우 오히려 편견을 강화하고 집단에서 배제하려는 심리를 증폭시킬 수 있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진 못해 원작의 뉘앙스를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버나드 로즈 감독은 이러한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이야기하고 있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백인 여성인 헬렌은 도시 괴담에 관한 대학원 논문을 쓸 준비를 하다가 '캔디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괴담의 내용은 거울을 보며 그 이름을 다섯 번 부르면 어느샌가 캔디맨이 등 뒤에 나타나 갈고리 손으로 그 사람을 잔혹하게 죽인다는 것이다.
헬렌은 처음엔 이 이야기를 장난처럼 듣다가, 학교의 흑인 청소부로부터 실제 있었던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캔디맨이 산다고 알려진 '카브리니 그린'으로 향하게 된다.
'카브리니 그린'은 저소득층 주택 단지로 흑인 빈곤층들이 모여 사는 소위 '게토'라고 불리는 동네다. 이런 곳은 미국에서 보통 '밤에 가면 안 된다', '가면 총을 맞는다'는 둥 하는 소문이 도는 곳인데, 전형적으로 부의 계급에 따라 인구를 분리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얀 피부에 풍성하게 스타일링한 금발 머리,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주인공이 나타나자 단번에 시선이 쏠리고, 구석구석 모여있는 사람들에게서 수근거림이 시작된다.
늘 '다수'에 속했던 이들은 처음으로 소수가 되는 공포심을 경험하게 된다. 초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 미지의 공간이나 존재에 대한 두려움도 결국 근본적으로는 같은 원리를 가지고 있다. 흉가, 폐가와 관련된 괴담 역시 '남'의 공간에 들어갔다는 두려움, 이곳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두려움이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캔디맨은 나오지도 않았지만 악취를 풍기는 노후된 동네에서 연구를 진행하기란 쉽지 않다. 주민들은 냉담하고 적대적이며 몇몇은 폭력적이다. 당연하게도 이들의 반감은 개인이 아니라 주인공이 속한 세상 전체를 향하고 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헬렌은 실재하는 카브리니 주민들의 공포를 알게 된다. 그들이 '벽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낙후된 시설과 일상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공권력으로부터 충분한 관심과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나드 로즈는 이러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인종차별, 빈부차별이 실제로 흑인들의 생사에 미치는 영향을 고발한다.
캔디맨의 살인 동기 역시 그의 억울한 죽음의 이유가 오랜 차별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18세기에 살던 화가로, 좋은 교육을 받았고 화가적 재능도 뛰어났다. 그러나 백인 여성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다가 서로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오른손을 잘리고, 온몸에 꿀이 발린 채 벌떼에 던져져 끔찍하게 살해당한다.
인종간 결혼은 물론 교류마저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심지어는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의 '노예'였던 시대가 있었다는 끔찍한 사실은 인류 전체가 언급하기엔 불편하고, 잊기엔 너무 가까운 이야기이다.
영화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끝까지 캔디맨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부분은 모호하게 마무리한다. 그리고 환각과 공포에 시달리던 헬렌에게 동료였던 버르나데트를 살해했다는 '누명'이 씌워지고, 캔디맨에 대한 그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하면서 카브리니 주민들이 겪었던 차별과 배제의 경험을 반복한다.
결말에서 결국 헬렌은 캔디맨과 동화되어 스스로 전설 속 존재가 되면서 또 다른 '괴담'의 탄생을 예견한다. 여기서 헬렌이 남편이 본인을 무시하고, 대학생과 바람을 피우고 있는 상황에 놓인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을 가진 인물이어야 했던 이유가 드러난다.
과장된 주장일지 모르지만 괴담을 '즐길'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건 특권이자 사치다. 이들은 공포를 느끼고 경계하는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 되는 '그들'에 자신이 속하지 않음에 안도할 수 있다. 반면 당사자들은 '괴물'이 되지 않고는 자신의 상황을 알리지도, 억울함을 해소할 수도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영화 초반 도시 전설에 대해 강의하는 일리노이 대학 교수이자 헬렌의 남편인 트레버는 강의 중 '괴담은 현대의 구전 동화다. 도시 사회의 공포가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어린 시절 겁이 많던 나는 '밤늦게 혼자 다니다가 만나는 귀신, 괴물' 등에 대한 괴담들이 사실은 범죄자나 위험 요소(낡은 하수구, 맨홀 뚜껑, 야간 졸음운전 등)를 경계하라고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괴담에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의도를 알고 나니 괴담 자체가 미지의 존재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캔디맨 같은 '괴담'들은 이와 다른 관점으로, 그들을 경계하라는 것이 아닌 그 속에 숨겨진 차별과 혐오의 본질을 들여다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이 더 많이 소비되고 분석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캔디맨>(1992) 현재 왓챠에서 시청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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