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포함된 글입니다.
한 작가가 이성의 심리를 평균 이상의 수준으로 파악해, 그 이성을 주인공으로 작품을 썼을 때 그것이 관객 혹은 독자에게 얼마만큼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나는 사실 이에 대해 늘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남성 작가의 작품 속 여성 캐릭터 혹은 여성 작가의 작품 속 남성 캐릭터는 어느 정도의 몰이해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필연적인 이질감을 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 생각이 처음으로 흔들렸던 것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을 읽었을 때이다. 정확히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은 후 나는 '남성 작가가 이정도로 섬세한 여성 심리를 묘사할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시각에 따라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입체적인 인물을 그려냈다는 점과 여성의 시각에서 대상화된 남성을 그려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동성을 그만큼 그려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니까.
이번에 소개하려고 하는 영화 <녹색 광선>은 에릭 로메르 감독이 60살이 넘었을 80년대에 쓴 각본임에도 현재까지도 또 한국에서도 많은 여성 관객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법같은 사랑을 기다리지만 스스로 찾아 나설 용기는 없는 소심한 여성'이라는 복잡한 캐릭터를 섬세하게 그려낸 이 영화는 외로운 이에겐 지옥과도 같은 여름 바캉스 시즌을 맞이하며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 델핀은 파리에 살고 있는 젊은 프랑스 여성으로 곧 여름휴가를 떠날 참이다. 프랑스에선 주로 한 달 정도의 바캉스 기간이 주어지는데, 델핀은 4주간의 꿈같은 여행을 떠나기도 전, 약속이 깨져버리고 만다. 실망은 불안으로, 이는 또다시 우울로 바뀐다. 주변 사람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새로운 동행을 찾으라고 하지만, 내성적이고 섬세한 성격의 델핀은 즉흥적인 만남이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는 와중,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는 델핀과 바캉스를 떠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수화기 너머에서 관객에게까지 느껴지는 남자의 무관심에 델핀의 우울은 절정에 달한다.
사람이 절박해지면 미신을 찾게 된다고, 델핀은 길에서 주운 트럼프 카드 한 장, 잡지에 쓰여있는 별자리 운세 하나하나에 기분이 쉽게 들뜨고 또 곤두박질 친다. 가족들과의 휴가도 거절하고만 델핀은 스스로도 무얼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다. 이번 휴가만큼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도전을 해보리라 결심했지만, 그러기 위해선 평소에 하지 않던 모험을 해야만 한다. 델핀에겐 그럴 용기가 없다.
불안한 마음을 해결할 새도 없이 시간은 흘러, 한 해 중 가장 덥고 가장 활발한 바캉스 시즌이 시작된다.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한 자신과 달리, 가족, 친구, 연인과 바캉스를 떠나는 주변인들을 보며 델핀의 마음은 거의 패닉 상태다. 결국 예정에 없던 친구의 휴가지에 따라가지만 그곳에서도 마법 같은 사랑은커녕 불편한 자리에서 자신과 남의 기분만 상하게 한 것 같아 혼자 돌아오고 만다.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델핀은 짝사랑하고 있는 남자가 있는 산으로 떠나지만 그를 만나지도 않은 채 돌아온다. 다시 파리. 휴가를 떠나지 않은 이들이 언제나와 같이 바쁜 도심 생활을 하는 중간에 화려한 색의 바캉스 드레스를 입은 델핀이 있다. 바캉스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들도 많은데, 싶다가도 왠지모를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특별한 바캉스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연히 만난 친구의 도움으로 델핀은 다시 여행을 떠난다.
혼자 해수욕을 즐기는 바캉스는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은데, 딱히 좋지도 않다. 바다 위에 떠있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일 뿐이다. 특별함이라곤 없다. 다시 우울에 빠지려는 찰나, 델핀은 자신과 정반대의 자유로운 성격을 가진 엘레나를 만나게 된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홀로 여행을 즐기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약혼자가 있어도 남자들과의 만남을 즐기는 그는 델핀이 낭만을 찾으며 정작 그것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둘에게 남자들이 다가오지만 델핀은 이번에도 새로운 만남을 거부하고 홀로 파리로 갈 기차표를 예매한다.
이렇게 우울한 바캉스가 또 있을까? 누구보다 낭만을 원하는 델핀이지만 그의 삶엔 마법같은 우연도, 운명 같은 사랑도 없다. 그저 지친 채 짐가방을 들고 대합실에 앉아 있는 델핀은 이제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난다. 델핀과 비슷하게 홀로 여행을 하고 있는 남자는 적당히 적극적이고 적당히 소극적이다. 주말 동안 목공예 연수를 받으러 간다는 남자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델핀의 말을 듣고도 개의치 않아한다. 아무렇지 않게 역 대합실의 우울에 대해 말하는 남자를, 델핀은 믿어보기로 한다.
그는 델핀과 비슷하다. 낭만을 좇지만 경험은 적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편하고 즐겁다. 운명의 상대일까? 이제 델핀이 기다리는 건 단 하나, 신호다.
'녹색 광선'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녹색 광선'은 해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기 직전, 빛의 굴절 현상에 의해 녹색의 섬광을 발하게 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우연히 이에 대해 듣게 된 델핀은 이 이야기에 빠르게 매료되고, 자신을 따르던 희미한 녹색의 기운의 끝에 이 '녹색 광선'이 있을거라 믿게 된다.
마음 편히 함께 휴가를 보낼 수 있는 친구나 연인이 없다는 것은 델핀의 우울의 주된 이유다. 자신감 하락은 곧 자기 혐오로 이어진다. 델핀은 극복하기보단 거부한다. 무관심한 듯 굴며 자신을 상처 줄지 모를 것들을 외면한다. 이런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지만, 그토록 바라던 마법 같은 운명이 찾아온다면 아마 델핀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다시 사람을, 사랑을 믿게 될 수 있을까? '녹색 광선'은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아폴론의 신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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